우주 방사선과 반도체 — 이 블로그의 새 카테고리를 시작하며

2026. 6. 7. 17:21우주방사선과 반도체

화학공학과에서 반도체 방사선 연구를?

필자의 전공은 화학공학이다. 화학공학과에서 반도체 소재와 소자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고, 거기에 방사선까지 조사한다는 연구 주제는 화학공학회에서도, 반도체 학회에서도, 방사선 학회에서도 어느 한 곳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주제였다.

그럼에도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직접 설계하고 공정을 진행하여 소자를 완성한 뒤, 양성자선·감마선·중성자선을 조사하고 특성 변화를 측정하는 실험을 반복했다. 연구 대상은 주로 GaN(질화갈륨)과 SiC(탄화규소) 같은 wide bandgap(WBG) 반도체 소재를 이용한 소자들이었고 이들에 방사선을 조사하여 특성을 측정했다. WBG 반도체는 높은 항복전압과 고온 동작 특성 때문에 전력 소자로 주목받고 있었지만, 방사선 환경에서 어떤 거동을 보이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당시 국내에 거의 없었다. 그 공백을 직접 채우는 작업이었다.

발표장에서 "이 연구가 어디에 쓰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명확한 한 줄 답이 필요했다. 그 답은 결국 우주에서 왔다.

 

왜 지금인가

우주 산업의 무게중심이 정부 주도에서 민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발사 비용이 낮아지고 소형 위성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과거에는 대형 우주기관만 고민하던 문제가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설계실로 내려왔다. 그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방사선이다.

위성 부품 선정 단계에서 방사선 내성을 정량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면, 궤도에서의 오작동은 예방이 아니라 사후 대응의 영역이 된다. 실제로 궤도에서 보고된 이상 동작의 상당 부분은 단일 이벤트 효과(SEE)나 총이온화선량(TID)으로 설명된다. 이미 발사한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수정 비용은 설계 단계와 비교할 수 없다.

 

방사선 문제는 우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방사선에 의한 반도체 오작동은 우주에서 가장 빈번하고 치명적으로 발생하지만, 지상이라고 안전하지는 않다. 우주선(cosmic ray)이 대기와 충돌하면서 생성된 중성자가 지표면까지 도달하고, 이 중성자가 반도체 소자와 반응하여 단일 이벤트 효과(SEE)를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2010년대 Toyota 차량의 급발진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우주선 유래 중성자에 의한 SRAM 비트 반전(SEU)이 전자제어장치(ECU)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식적으로 확정된 원인은 아니지만, 지상 전자 시스템에서 방사선 효과가 유력한 가설로 거론된 대표적 사례다. 항공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도 10km 이상의 순항 고도에서는 지상 대비 중성자 플럭스가 수백 배 높아지며, 항공기 탑재 DRAM에서 소프트 에러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항공 전자 업계의 설계 고려 사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즉, 방사선에 의한 반도체 오작동은 우주 시스템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동차·항공·의료·금융 서버에 이르기까지 고신뢰성이 요구되는 모든 전자 시스템의 문제다.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것

필자는 우주 방사선 시뮬레이션 및 반도체 소자 방사선 내성 평가 플랫폼인 tools.heliaslab.com을 제작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 블로그는 그 플랫폼의 각 기능을 뒷받침하는 물리 원리와 계산 방법론을 공개하는 기술 연재다.

다루는 주제는 다섯 개 시리즈로 구성된다.

  • SEE Tool: 단일 이벤트 효과의 발생 확률과 소자 적합성 판정
  • NIEL/TID: 비이온화·이온화 손상의 누적 계산과 복합 열화 판정
  • Compare: 가속기 빔 조건과 우주 방사선 환경의 등가 매핑
  • Solar-rad: 우주 태양전지의 EOL 출력 예측과 방사선 내성 평가
  • STOP: 이온 저지능과 브래그 피크의 물리, 펨토초 레이저 SEE 모사

각 포스팅은 개념 설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수치와 단계별 계산 과정을 함께 제시하여, 독자가 자신의 소자와 궤도 조건에 직접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

 

누가 읽으면 좋은가

  • 위성 부품을 선정하거나 RHA(방사선 강화 보증) 보고서를 검토해야 하는 엔지니어
  • 방사선 시험을 발주하거나 가속기 빔타임을 계획하는 담당자
  • 우주용 태양전지 EPS 설계에서 EOL 전력 버짓을 수립해야 하는 설계자
  • 펨토초 레이저로 SEE 모사 시험을 계획하는 연구자

방사선 물리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배경 개념부터 순서대로 따라올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엔지니어라면 각 포스팅의 수치 분석과 실무 기준값 섹션부터 바로 참조해도 무방하다.

 

마지막으로

이 분야에서 국내에 공개된 계산 도구와 데이터베이스는 아직 부족하다. 이 블로그와 tools.heliaslab.com이 그 부족분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관련 분야의 연구자, 엔지니어, 그리고 이제 막 우주 방사선이라는 주제와 마주친 모든 분께 실질적인 참고가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시작한다.